경순왕(신라 제56대 국왕) : 그의 선택, 최선이었나?
한국사에서 천 년 왕국이라 불리는 신라는 오랜 세월 한반도 남부를 통치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그렇듯, 영광 뒤에는 쇠퇴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978)은 바로 그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던 인물입니다. 그는 왕으로서의 위엄보다는 백성을 위한 결단으로 오늘날까지 평가받고 있습니다.
1. 경순왕, 왕이 되다
경순왕은 신라 제56대 국왕으로, 본명은 김부(金傅)입니다. 그는 문성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찬 효종,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계아태후입니다. 927년, 전왕인 경애왕이 후백제의 견훤에게 피살되면서 신라 왕위는 공백 상태에 빠졌고, 경순왕은 견훤의 지원으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신라는 실질적인 국력이 바닥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한반도는 후삼국 시대로, 후백제와 고려가 세력 다툼을 벌이던 혼란기였습니다. 경순왕은 실권이 거의 없는 명목상의 군주에 가까웠으며, 신라의 영토는 이미 양 세력 사이에 잠식당하고 있었습니다.
2. 후백제와 고려 사이, 신라의 고립
재위 기간 동안 신라는 후백제와 고려의 격전지로 전락했고, 경순왕은 사실상 자주적인 통치를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후백제의 견훤은 끊임없이 신라 영토를 침입하고 약탈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영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특히 930년 고창 전투에서 왕건은 견훤을 크게 격파하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고, 경순왕과의 외교를 강화했습니다. 931년에는 고려 태조가 신라의 수도를 방문해 경순왕을 만나 연회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도움의 손길이라기보다는, 신라를 무력 없이 흡수하기 위한 외교적 행보였습니다.
3. 항복, 백성을 위한 마지막 결단
935년, 경순왕은 현실을 직시하고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기로 결심합니다. 더는 왕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도 있었지만, 백성들의 희생을 막기 위한 결단이기도 했습니다. 신하들과 왕자 마의태자는 이에 반대했으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미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않아서, 무고한 백성들이 길에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그해 겨울,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며 수도를 떠났습니다. 왕건은 그를 정승공(正丞公)으로 봉하고,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 경주는 식읍으로 주어졌고, 신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왕자 마의태자는 항복을 반대하며 금강산으로 들어가 은둔하게 되는데, 이는 훗날 “마의태자 전설”로 이어져 백성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로 남았습니다.
4. 신라의 마지막 왕,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다
경순왕은 978년 고려에서 생을 마쳤으며, 시호는 경순(敬順) 또는 효애(孝哀)라 불립니다. 고려 왕실은 그를 예우했을 뿐 아니라, 그의 후손이 왕비가 되어 고려 제8대 현종을 낳게 됩니다. 이처럼 신라는 멸망했지만, 혈통은 고려 왕실 속에 스며들어 새 시대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사관들은 경순왕을 두고 “나라를 지키지 못했지만, 백성을 살렸다”고 평가합니다. 전쟁을 피하고 피폐한 백성을 보호한 그의 선택은 단순한 항복이 아니라, 평화로운 정권 이양의 상징적 사례로 남았습니다.
5. 나라를 바쳐 백성을 살리다
경순왕은 강력한 왕은 아니었지만, 위기의 순간에 백성을 위해 큰 결단을 내린 인물입니다. 신라가 천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고려로 넘어간 그 순간, 그는 단순한 국왕이 아닌, 시대의 길목에 서서 전쟁 없는 통합을 이끈 조율자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는 ‘항복한 왕’이 아니라, ‘살린 왕’, ‘길을 연 왕’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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