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2일 목요일

【756년 6월 14일】 양귀비의 비극적인 최후 : 당나라 황실의 사랑과 몰락

756614양귀비의 비극적인 최후 : 당나라 황실의 사랑과 몰락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인 중 한 명, 양귀비(楊貴妃). 그녀의 사랑과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닌 당나라 황실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1. 현종과 양귀비의 만남

 
737, 당나라 황제 현종(玄宗)은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를 잃은 뒤, 후궁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이가 없자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새로운 여인을 찾아달라고 지시합니다.
 
고력사는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아내였던 양옥환(楊玉環)이 절세미인이라 소개합니다. 황제는 직접 며느리를 후궁으로 삼는 것에 망설였지만, 결국 양옥환은 도교 여도사로 출가한 뒤 다시 황실로 돌아와 양태진(楊太眞)이란 이름으로 귀비가 됩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역사 속의 양귀비로 불리게 됩니다.

양귀비
▲ 중국 정부가 공식 인정한 양귀비 초상화 [출처 : 디지틀 조선일보]
 

2. 권세를 쥔 양귀비 일가

 
양귀비가 귀비로 책봉되자, 그녀의 친족들도 고위 관직에 오르며 권세를 누렸습니다. 아버지는 대귀족으로 추서되었고, 오빠들과 친척들도 요직에 앉았습니다. 특히 그녀의 사촌 양국충(楊國忠)은 실질적인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3. 안록산과의 갈등, 그리고 반란

 
양귀비가 총애하던 변방 장수 안록산(安祿山)은 한때 그녀와 양국충 모두의 신임을 받았으나, 시간이 지나며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됩니다. 결국 안록산은 756안사의 난이라 불리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며 수도 장안을 공격합니다.
 

4. 마외역에서 벌어진 비극

 
황제는 반란을 피해 촉()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도중에 도착한 마외역(馬嵬驛)에서 군사들은 양국충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며 처형합니다. 이어 군사들은 양귀비에게도 책임을 물어 황제에게 그녀를 죽일 것을 요구합니다.
 
결국, 황제는 양귀비에게 얇은 비단을 건넸고, 양귀비는 배나무에 목을 매 자결하게 됩니다. 756614, 그녀의 나이는 38세였습니다.
 

5. 문학과 역사 속의 양귀비

 
양귀비의 사랑과 죽음은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대표작 장한가(長恨歌)에 아름답고도 애절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와 사치, 그리고 몰락의 교훈을 담고 있어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비취 깃발 흔들흔들 가다가 서다가, 서쪽으로 성문을 나서기 백 리 남짓, 육군(六軍)이 꿈쩍 않아 어쩌지도 못하고, 어여쁜 여인은 말 앞에서 죽어갔네! 황제는 얼굴 가린 채 구해 주지 못하고, 돌아보는 얼굴엔 피눈물만 흘렀네.” - 장한가
 

6. 양귀비 생애의 의미

 
양귀비의 생애는 단순한 황실 로맨스가 아니라, 절정의 권력과 화려함이 어떻게 몰락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그녀의 죽음은 당 현종의 사랑이 군사와 백성의 분노 앞에 무력했음을 상징합니다.
 
역사는 사랑만으로는 황실도, 나라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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