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천왕(고구려 제9대 왕) : 개혁과 위기 속의 군주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197년)은 고구려 제9대 국왕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백성들을 위한 개혁을 시도했던 군주입니다. 그의 치세는 외세의 침입과 내란, 그리고 내정 개혁이 맞물린 시기로, 고구려의 중흥을 준비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 왕위 계승과 이름에 얽힌 혼란

 

고국천왕은 이름이 남무(男武) 혹은 이이모(伊夷模)로 전해집니다. 아버지 신대왕이 붕어한 뒤, 179년 12월 왕위에 올랐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천왕이 신대왕의 둘째 아들로, 맏형 발기(拔奇)가 불초하여 백성들이 이이모를 왕으로 추대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 측 사서인 《삼국지》에서는 이이모가 고국천왕이 아니라 산상왕의 이름으로 나오며, 고국천왕 자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로 인해 학계에서는 《삼국지》가 고국천왕을 누락한 것으로 보며,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다 신뢰하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2. 고국천왕의 주요 업적

1) 백성 위한 구휼 정책 – 진대법 시행

고국천왕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기원후 194년에 시행된 **진대법(賑貸法)**입니다. 이는 곡식이 부족한 봄철에 국가가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 후 갚게 하는 제도로, 당시 빈곤층 구제를 위한 선진적인 사회복지 정책이었습니다. 고구려가 단순한 무력 국가를 넘어 백성을 위한 행정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평가받습니다.

2) 인재 등용 – 을파소의 발탁

고국천왕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실력 있는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특히 191년에는 평민 출신인 을파소를 국상(국무총리 격)으로 임명했습니다. 기존 귀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상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할 것이다.”라고 공포하며 을파소를 적극 지지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을파소는 국정을 안정시키며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합니다.

3) 내부 반란 진압

재위 중인 190년에는 중외대부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가 권력을 남용하자 이들을 숙청하려 했고, 이에 반발한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191년에 수도를 공격했지만 진압당했습니다. 이후 국정을 개혁하고, 실질적인 개편을 단행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외적의 침략과 군사 대응

184년에는 후한(중국)의 요동 태수가 침공했으며, 왕은 동생 고계수를 파견했지만 패배합니다. 이후 직접 출병해 좌원(坐原) 전투에서 한군을 격퇴함으로써 국토를 방어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는 고국천왕의 군사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3. 복잡한 왕실 가계와 권력 투쟁

 

고국천왕의 형제들 간에는 치열한 권력 다툼이 있었습니다. 특히 동생 고발기(發岐)는 고국천왕 사후 왕위를 이어받은 산상왕(동생 고연우)을 인정하지 않고, 외부 세력인 공손도의 군대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자살합니다. 이러한 갈등은 고구려 초창기 왕권 안정화에 큰 도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왕후인 우씨는 제나부 우소의 딸로, 고국천왕 사후 산상왕과 재혼하여 정치적 연속성과 가계 내 균형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4. 동시대 주변 국가 상황

 

고국천왕의 재위 기간(179~197년)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큰 변동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백제는 초고왕, 신라는 아달라ㆍ벌휴ㆍ내해 이사금이 차례로 즉위했으며, 일본에서는 세이무 천황과 주아이 천황의 통치가 이어졌습니다. 중국 후한은 정치 혼란기였으며, 황건적의 난과 군벌 분열이 겹치며 고구려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5. 고국천왕의 사망과 유산

 

고국천왕은 197년 5월, 재위 18년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안장되었으며, 이후 고구려는 산상왕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의 개혁과 인재 등용은 고구려 중기 국가 체제 정립에 중요한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고국천왕은 단순한 전사적 이미지의 고구려 왕이 아니라, 체제 개혁과 민생 안정에 노력한 군주였습니다. 진대법과 같은 제도적 기반 마련, 신분을 초월한 인재 발탁, 외적 침입 방어, 내란 진압 등 그의 치세는 고구려가 고대 국가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