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恭愍王, 고려 제31대 국왕) : 개혁의 몸부림과 좌절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은 고려 제31대 국왕으로, 고려 말기 격동의 시기를 개혁과 자주정신으로 이끈 인물입니다. 원나라의 간섭과 부패한 권문세족의 압박 속에서도 고려의 자주성과 민중의 삶을 회복하려 한 개혁 군주였으며, 그의 통치는 고려 말 조선 초로 이어지는 역사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 왕위에 오르기까지 : 원나라에서의 숙위 생활

 

공민왕은 1330년 음력 5월 6일,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왕기(王祺), 휘는 왕전(王顓)이며,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Bayan Temur, 伯顔帖木兒)입니다.

 

1341년, 왕의 동생 ‘강릉대군’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충혜왕과 충목왕의 사망을 거치며 왕위 계승의 기회를 노렸지만, 정치적 세력 다툼으로 인해 번번이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다 1351년 원 황실이 충정왕을 폐위하면서 드디어 공민왕은 즉위하게 됩니다.

 

2. 즉위 후 개혁의 시작 : 정방 폐지와 부패 척결

 

즉위 직후 공민왕은 정방(政房)을 폐지하며 개혁을 시작합니다. 이는 고려 무신정권 시기부터 유지되던 인사 독점 기구였으며, 폐지는 정치적 구습을 바로잡는 상징적인 조치였습니다.

 

이어 부패 관리 숙청, 억울한 노비 해방, 토지 소유 정리 등의 명령이 이어졌고, 관리들에게 5일에 한 번씩 직접 보고하게 하여 국정에 직접 개입했습니다. 이는 국왕 중심의 책임 정치를 강화하려는 시도였습니다.

 

3. 반원 자주화와 기씨 일족 숙청

 

공민왕의 가장 강력한 정치 행보는 반원 자주화 정책이었습니다. 그는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의 부원세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기철과 기씨 일족을 1356년에 대대적으로 숙청했습니다(병신정변). 이로 인해 원나라에 설치되었던 쌍성총관부를 회복하고, 고려의 독립성을 점차 회복했습니다.

 

또한, 원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고려의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세워갔습니다.

 

4.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고려의 위기

 

공민왕 재위 중 고려는 홍건적과 왜구의 연이은 침입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1359년과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복주(지금의 안동)로 피신합니다. 이때 최영, 이방실, 안우 등이 활약하여 개경을 수복하였으나, 내정은 큰 타격을 받습니다.

 

같은 시기 왜구도 빈번히 침입하여 백성들의 삶을 위협했고, 공민왕은 이성계, 최영 등을 중심으로 적극 대응했습니다.

 

5. 신돈의 등용과 전민변정도감 설치

 

1365년, 공민왕은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이후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가, 승려 출신의 신돈(辛旽)을 등용합니다. 신돈은 정치 감각과 개혁의지를 겸비한 인물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불법 겸병 토지를 정리하고 억울한 노비들을 해방시켰습니다.

 

이 개혁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나, 기존 권문세족과 무장세력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1371년 신돈은 제거되고 개혁은 중단됩니다.

 

6. 명나라와의 외교, 몽골과의 단절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공민왕은 명과 외교 관계를 맺고, 원나라와의 종속관계를 완전히 청산합니다. 1370년, 명나라의 연호인 홍무(洪武)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고려는 100여 년간 지속되었던 몽골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7. 최후의 나날과 비극적 죽음

 

말년에 접어든 공민왕은 정치 개혁 의지를 상실하고 자제위라는 청년 집단을 궁에 들여 술과 향락에 빠졌습니다. 결국 1374년, 자제위 중 한 명인 홍륜이 공민왕의 후궁과 간통한 사실이 발각되자, 이를 덮기 위해 공민왕을 암살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고려의 왕권은 크게 흔들렸고, 이후 이인임에 의해 어린 우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8. 공민왕의 역사적 평가

 

공민왕은 몽골의 간섭에서 고려를 해방시키고, 권문세족을 제압하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시도한 개혁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외침과 내부의 부패, 개인적인 고통 속에서 개혁은 중도에 좌절되었고,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개혁정신은 훗날 이성계와 조선 건국 세력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고려 말기 새로운 사회질서를 예고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공민왕의 생애는 고려 후기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그의 개혁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시대의 흐름을 바꾸려 했던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