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6월 17일】 프랑스 국민의회 결성
1. 프랑스 혁명의 시작, 평등을 향한 첫걸음
1789년 6월 17일, 프랑스에서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제3신분(평민 계층) 대표들이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 결정은 곧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2. 신분제 사회의 갈등
18세기 말, 프랑스 사회는 크게 세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 제1신분 : 성직자
- 제2신분 : 귀족
- 제3신분 : 평민, 상인, 농민, 부르주아 계층 등
프랑스 왕 루이 16세는 점점 심각해지는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1789년 5월, 175년 만에 신분회의(Etats Généraux)를 소집했습니다. 이 회의에는 제1신분과 제2신분이 각각 300명씩, 제3신분이 600명 참여해 총 1,20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제3신분이 다수였지만, 표결 방식이 ‘신분별 1표’ 였기 때문에 귀족과 성직자가 손을 잡으면 제3신분의 의견은 쉽게 묵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제3신분의 대표자들은 점점 불만을 쌓게 되었고, 정치적 독립을 모색하게 됩니다.
3. 국민의회의 탄생
마침내 1789년 6월 17일, 제3신분 대표들은 신분회의를 탈피하고 단독으로 국민의회 설립을 선언합니다. 이들은 “우리는 프랑스 국민을 대표한다”며, 국왕의 승인 없이도 입법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이는 군주 중심의 절대왕정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습니다.
4. 테니스 코트 서약
국민의회 선언 후, 이들의 회의 장소였던 회의장이 폐쇄되자 대표들은 베르사유 궁전 내 테니스 코트 건물(Jeu de Paume)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6월 20일, 이들은 유명한 ‘테니스 코트 서약(Serment du Jeu de Paume)’을 통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절대 해산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졌습니다.
이 서약은 단순한 정치 선언이 아닌, 프랑스 시민 사회가 절대왕정에 맞서 권리를 주장한 역사적 장면으로 기록됩니다. 이후 성직자와 일부 귀족까지 국민의회에 동참하면서, 구체제는 점차 균열을 보이게 됩니다.
5. 역사적 의의
국민의회 결성과 테니스 코트 서약은 프랑스 혁명 초기 가장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로, 시민 계층이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주도권을 쥐기 시작한 계기였습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프랑스는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 국민 주권을 핵심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 체제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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